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菊花香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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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미주는 고양이처럼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밖은 여름 소낙비가 한차례 쏟아 부은 뒤 잠잠해졌다. 미주는 무릎
위에 턱을 얹고 눈을 부릅뜬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난 주에는 위 내시경 검사를 했다. 세포를 떼어 내 정밀 검사를 한
결과도 이틀 전에 나왔다. 틀림없는 위암이었다. 그것도 한 참이나
진행된 위암 3기. 승우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미주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도 위암 3기라는 것도, 단지 그는 미주가 몸살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며칠 푹 쉬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미주가 정란의 입 단속을 철저히 시켰기 때문이었다.
미주는 정란의 처사가 한편으로 몹시도 서운했고 야속했다. 정란이
방서선과로 느닷없이 손을 끌지만 않았더라도 미주는 한 달이든
최소한 며칠이든 드디어 아기를 가졌다는 기쁨을 만끽하며 남편과
함께 열광했을 것이다. 승우는 자신을 안아 빙빙 돌리고 말이 되어
여왕마마. 어서 안장에 오르십시오. 하며 아파트 실내 곳곳을 태우고
다녔을 것이다.
얼굴에 쏟아지는 봄햇살처럼 소담스런 첫눈이 내리는 것처럼 벚꽃이
얼굴에 떨어지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얼굴과 손발에 수백 번의
키스를 했을 것이다.
기쁨을 온전히 하늘의 선물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런데? 미주는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자가 임신 진단을 한 후 그 기쁨이 하루를 채 못 갔다. 정란에게
임신을 확인받고는 그냥 한번 받아 보자고 한 위 촬영
검사에서………정말 너무나 잔인하고 매정한 처사였다. 생명을
확인한 뒤 곧바로 머잖아 죽을 거라는 통보를 동시에 알려 주다니.
그러고 보면 미주에게 천국과 지옥의 거리는 10분 남짓한 거리였다.
인스턴트 커피 한잔 마시는 시간, 담배 한 대 피울 시간에 상황과
감정이 극과 극으로 바뀐 것이다. 누군가 그 무렵에 동전을 두 번
던진 것 같았다. 한 면은 천국의 기쁨, 한 면은 지옥의 초대장,
그렇게 누군가 미주의 운명의 동전을 두 번 던졌고 공교롭게도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 같은 희비극을 동시에 즐기려는 빌어먹을, 그
작자가 대체 누구인가? 신은 너무나 멀리 있었고 그 두 현장에는
미주와 정란이 있었다.
망할 것! 내가 그렇게 안 받는다고 했는데. 암이란 괴물에 기습당할
때 당하더라도 당분간은 모르는 게 백번 나았을 것이다. 아기를 가진
큰 기쁨을 망친 게 미주로서는 분통이 터졌다. 정란이가 더 없이
미웠다.
절친한 친구란 것이 망쳐 놓았어! 내가 승우랑 결혼한다고 하자
시샘을 감추지 못하더니. 아기 가진 꼴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이거지?
처음에는 정란에게로 맹렬한 분노가 쏟아졌다. 몇 번이나 정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지만 미주는 꼴도 보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 조차도
하지만 정란은 집요했다. 병원에 나와서 검사를 받지 않는다면
승우에게 당장 전화하겠다는 정란의 말에 미주는 조직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미주의 예상대로 좋지 않았다. 암이라는 건 특히 위암이라는
건 약간의 증상이 나타난 순간 이미 상당히 진전된 상태인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암 전문의는 자료를 들여다보다가 정란의 옆에 앉은 미주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그리 자신감 있어 보이지 않았다. 흐음 일단
입원부터 빨리 하시죠! 그럼 아기는 어떻게 되는 거죠? 태아
말씀이시군요…….. 의사는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바뀌는 정란을
흘끗 본 뒤 뒷목을 손 칼날로 툭툭 내리쳤다. 성의 없고 무례한
인상이었다.
제 소견으로는 현재 부인께서 태아에 대해 신경 쓰실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상태가 이미 다른 기관으로의 전이까지 의심되는
정도니까요.
아……아기를 포기하란 건가요? 일단 환자가 우선 아니겠습니까.
누구나 자기 목숨에 대한 애착이 먼저니까요. 환자께서 건강을
회복하신다면 임신은 또 가능합니다. 물론 임신 중기를 넘어선
경우거나 말기의 환자는 최소한 조치만 내리고 아기를 출산한 뒤
본격적으로 치료하기도 합니다만, 미주는 냉정해지려고 애섰다. 좀
정확하게 얘기해 주시죠. 구체적으로 앞으로 어떤 치료를 받는다는
건가요? 아기를 키우면서 받을 수는 없나요?
그 말에 의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짜증이었다. 선배님! 그렇게 해
주세요. 이 친구는 지금 몹시 혼란스러울 테니까요. 정란이 착잡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그러자 의사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메모지에
플러스펜으로 위 모양을 그린 뒤 설명을 했다. 현재 부인 단계에선
외과 요법이 급선무이고 관건입니다. 여기 이렇게……….. 여기, 여기
이 부위가 그러니까…….. 일단은 위를 들어내야 합니다. 암 병소가
발견된 문제의 장기에 부속된 림프선까지 들어내고 여기…………
여기를 위 없이 바로 잇는 거죠.
의사는 펜 뚜껑을 가볍게 닫았다. 아기는 포기한다고 생각하시는 게
좋습니다. 위를 제거하는 수술은 큰 충격이죠. 또한 필요에 따라
항암제가 처방되고 방사선 치료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자연
유산은……….피할 수가 없습니다.
입원부터 하시죠. 서두르시는 게 좋습니다. 의사는 약속이 있는지
계속해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미주의 눈에는 의사의 태도가
매우 거슬렸다. 기껏해야 사람을 만나 커피나 마시고, 어느 골프장
캐디가 죽이더라. 술집 마담이 죽어더라 따위의 너절한 얘기를 하기
위해 벼랑 위에 서 있는 내게 이러나 싶었다.
선생님, 조금만 더 자세히,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위를 다
들어내면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좀 전에 다른 장기로 전이
가능성도 장담 못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잖아요.
미……..미주야! 그건 나중 일이야.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미리
지레짐작할 필요가 뭐 있니? 제 생각도 닥처 허와 같습니다. 부인의
경우는 일단 절개를 하고 속을 들여다보아야 좀더 자세한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흠, 배을 열면 일단 육안으로 보이는 암이
잔존하지 않도록 원발소 및 전이소를 완전히 다 제거합니다. 하지마
전이 흔적이 장기 도처에서 발견되면 그냥 닫습니다. 수술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열어 봤는데 막상 필요 없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요. 그 말에 미주는 피식.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이 작자는
환자의 배가 무슨 지퍼 달린 필통 같은 것인 줄 아나 봐. 한번 쓱
열어 보고 되면 꺼내고 안 되면 그냥 닫고.
암이 안 보이기도 한다는 뜻인가요? ……..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크기가 있다는 거지요. 다시 재발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
경우는요? 다시 배를 열고 제거하기도 하고 2차 수술이지요. 3차까지
재발한다면 그때부터는 항암제를 집중적으로 써야겠지요. 항암제요?
의사는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나, 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항암제는 독가스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몸 속에 가스를 채우는 것이죠. 그래서 나쁜 암세포를 죽이거나
증식을 더디게 만들죠. 물론 정상 세포의 손실도 감수해야 하겠지요.
제 몸 속에다가 무슨 화학전을 일으킨다는 말로 들리네요. 맞나요? 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의 요지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니 한번 해 봐라. 지퍼를 열 듯 배를 북 째서 잘라낼 것 잘라
내고 다시 닫았다가 재발하면 다시 열거나 아니면 독한 약을 몸 속에
잔뜩 집어 넣어 화학전을 일으키고 맞습니까? 으……….흐음! 미주는
벌떡 일어섰다. 미……..미주야! 왜 이러니? 결국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는 거 아닙니까? 맞죠?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그렇죠? …………..그렇습니다만. …..아………..아니! 선배님!
그러면 당신이 무턱대고 입원부터 하라고 하면 안 되죠. 최소한 낫게
해주겠다는 신념이나 확신 정도는 보여야지.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원해라. 배를 갈라 보고 난 뒤에 얘기하자. 재발돼도 어쩔
수 없다. 한마디로 복발복이고 재수다. 당신 의사로서 이런 투의
얘기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정란은 당황했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얘 심정을 이해해 주세요. 미주야 그만 둬. 무례하게 굴 이유가
없잖아. 없긴 왜 없어? 암 환자를 다루는 의사는 환자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어야 해. 너무 불안하니까, 참담하고 공포스러우니까. 그런데
저 사람은 마치 자신이 무료 시술이라도 해 주는 것처럼 자신은
절대로 죽지 않고 마치 나를 죽였다 살렸다 할 수 있는 것처럼 거들먹
거리는 자세로 앉아 능갈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잖아.
난 그만 나가 봐야겠습니다. 놀람과 불쾌감에 얼굴이 붉게 물든
의사는 정란에게 내뱉듯이 말하고는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놓인
차트를 들고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었다.
미주는 그의 뒷머리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 정도면 누가 의사를 못
해? 나도 한다. 나도 한다구! 그럼 맘대로 하시오! 의사는 한마디
던지고 화가 잔뜩 치민 얼굴로 문을 열고 사라졌다. 정란은
씩씩거리는 미주의 팔을 끌어당겨 앉혔다.
너 정말 왜 이래? 그렇게 막 나가면 안 돼. 그 선배는 알아 주는 암
전문의고 권위자라고. 권위자 좋아하네. 그딴 얘기나 지껄이면서
시술한다면 나도 하겠다. 신뢰감도 전혀 안 주고 환자에 대한
책임감초차 조금도 없잖아. 나이도 많아 봐야 40대 중반인 게
전문의면 뭐 하냐고? 인간이 안 됐잖아. 인간이! 더러운 자식!
미주는 분노감과 모욕감을 이기지 못해 부르르 떨다가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눈을 감았가가 다시 떴다. 그 동안 가슴속에서 몇
번이고 감정의 폭풍우가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왜
하필이면………..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잔혹한
운명이 내게로 온 걸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미주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위암에 걸리지
않으려면 30대엔 2년에 한 번씩, 40대엔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내시경 검사를 받아야 한다. 미주 자신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발병을 막을 수는 없지마 조기에 발견하면
완치율이 8. 90퍼센트까지 이르는 것이 위암이다.
증상이 나타난 뒤 부랴부랴 병원으로 가 투병 생활을 한 사람들을
미주는 몇 명 알고 있었다. 대학 선배의 아버지, 40대의 시나리오
작가 한 사람, 그리고 엄마의 여고 단짝 친구였던 경옥이 아줌마, 세
분 다 병원 침대 위에서 돌아가셨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바깥바람
한번 쐬지 못하고 침대에만 드러누워 실험용 동물처럼 갖은 고통을
모두 다 겪어 내다가.
경옥이 아줌마는 수술 뒤에 상태가 호전되어 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재발되었고 급기야는 식물 인간이나 다름없는 의식불명
상태로 3개월을 끌다가, 가족들의 결정으로 인공 호흡기가 제거
되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경옥이 아줌마는 매번 가족들에게
눈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경옥이 아줌마도 몇 년은 더 자연 상태에서 살 수 있었을 텐데. 여러
차례 배을 째고 조직 검사를 하고 해서 환자의 건강을 엉망으로
망가뜨렸다고 괜스레 큰돈을 쓰고 환자를 죽을 고생만 시키고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가족들의 얘기를 듣고 온 엄마가 언제가
미주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런 저런 경험으로 미주는 암 병원과 암 전문의에 대한 불신이 켰다.
현대 의학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환자를 대하는 의사와 병원의
태도가 인간적으로 무성의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환자는 물론
가족들에게 큰 불만이고 상처가 되어 남는다는.
정란이 등을 다독여 주는 가운데 미주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10대와 20대 내내 미주는 죽음을 가볍게
여겼다. 사는 게 어차피 죽어 가는 과정이고 보면 그 시기가 당겨진들
뭐 그리 큰 문제일 것이냐고 생각했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쓰러져
죽어도 여한이 없고 오히려 행복할 거라고, 승우를 다시 만나고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가 현실을 살아 낼 수 있었던 힘은 그런
정신력이었다.
그런데 막상 자신에게 선고가 떨어지자 분노와 슬픔, 허둥거림과
착잡함. 불안과 공포가 수시로 엄습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미주는 어느 정도 차분해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결정을 빨리 내려야 했다. 미주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중 하나뿐이었다. 병원에 들어가 투병 생활을 시작하는 것.
아니면 병실 침대를 거부하고 사는 데까지 꿋꿋하게 살아 가는 것. 그
양 갈래 선택 길에서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태아였고 남편
승우였다.
미주는 그 동안 여러 곳에서 자문을 구했다. 암이 이정도로
진전되었다면 의료적인 힘이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감당해 낼 수
있는가. 정말 태아는 포기하는 방법밖에 없는가. 투병을 시작했을 때
확률은 얼마나 되는가? 낫거나 재발할 확률은? 의료 조치를 받을ㄹ 때
얼마만큼 살 수 있는가? 연장은 얼마나 가능한가? 의료 행위를
거부하고 그냥 버틴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고통은 어느
정도인가? 그렇다면……….. 과연 아기를 낳을 가능성은 있는가?
건강한 아기는 가능한가? 당혹스러운 것은………경악스러운
것은………미주의 갈급한 의문에 대해서 선택의 기로에 선 그녀에
대해서 아무도 속 시원한 확신감을 주거나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는
거였다. 수많은 병원이 있고 첨단 의료 기기가 만들어지고 암에 대한
무수한 이론과 학설이 쉼 없이 쏟아지고 있다고 해도 암 당사자에겐
너무나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것이 현대 의학이었다.
추측만이 난무하거나 그건 아무도 모르죠. 하는 투의 대답
일색이었다. 또 한 가지는 미주 상태라면 현대 의학으로도 그리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암시의 말투와 인상을 풍기는
전문의들이 여럿이었다는 거였다. 정확히 말해서 의사 본인들도 암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그냥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
병원은 당신이 암과 싸우기로 마음 먹는다면 최대한 도울 것이다.
이기고 지는 당사자는 결국 당신이다. 당신이 하루라도 빨리 결론을
내려 주어야 당신과 우리 의료진이 힘을 합쳐 암 세포와 싸울 수 있지
않겠느냐. 고 얘기하고들 있었다. 적의 정체조차 모르는 멍청한
작자들! 한심해. 그런 것들이 가운을 입고 거들먹거리다니! 전화 벨이
울렸다.
감기 몸살은 어때? 남편 승우였다. 그저 그래.
내가 잘 아는 의사한테 물어 봤는데 감기 몸살이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신종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하더라. 여의도에 있는 제법
알아주는 내과 의산데 미주 너 데리고 나오래. 딱 떨어지게 처방해
주겠다고 나오기 힘들면 증상을 세세한 것까지 메모해 오래. 약을
조제해 주겠다면서 말이야. 어떻게 할까? 괜찮아. 한결 좋아졌어.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너 요즘 기분이 완전히 가라앉았잖아. 몸
컨디션이 그 정도면 약 먹어야 돼. 너 내가 몇 번이나 약국에서 사
들고 간 약도 먹지 않는 것 같더라.
정말 괜찮아지고 있어. 승우 씨 신경 쓰지마. 그럼, 내가 네 증상을
잘 아니까 다시 약 지어 갈게. 그 의사 엄청 실력 있거든. 나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 설거지나 청소 같은 것도 신경 쓰지 말고 푹
자. 에어컨은 되도록 켜지 말고 몸에 안 좋으니까. 끊는다.
미주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끊겼다. 그러더니 곧바로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왜 또? ………승우 씨 아냐? 미주야 나야! 정란이었다. 너냐? 왜?
왜라니? 이젠 너랑 말싸움하고 싶지 않아. 내가 수속 밟아 놨어. 네가
싫어하던 그 의사 아냐. 다른 병원이고 암 전문 센터인데 전부 다
전문의들로만 구성돼 있어. 시설도 최고고 승우 씨한테는 얘기했지?
승우 씨 뭐래? 당연히 너 입원하라지? 설마 아직도 안 한 건
아니지? ………..얘. 얘! 너 내 듣고 있는 거니? 낫는다는 믿음만
갖게 해 주면 나도 그런다. 나도 살고 싶어. 간절히. 그래 네가 보증
설래? 나 투병 생활로 골병만 들다가 죽이지 않겠다는 보증을 해 줄래?
그래. 내가 할게 하겠어. 담당 전문의도 못하는 걸 네가 어떻게
한다고 그래? 너……….정말 이렇게 나올래? 수많은 환자를 겪고 얘길
들었어도 너처럼 무지막지하게 나오는 얘는 첨이다.
너 지금 시기를 놓치고 있는 거야. 이 순간에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리는 짓을 저지르고 있을 수도 있어……………미주야 한번 해
봐. 어차피 죽는다치고 한번 원 없이 해 보자. 나도 도울 거고.
나………너도 그렇고 ………..승우 씨 생각하면 요즘 잠도 잘 안 오고
미칠 것 같다. 승우 씨가 나보고 뭐라고 그러겠니? 왜 진작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 정말 이럴 수 있느냐고 나한테 미친 듯이 따지면 내가
뭐라고 그러겠냐?
미주는 승우에게 알리면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죽지는 않아도
승우와 헤어져 집을 나가겠다고 했다. 한다면 해내는 그 성격을 익히
잘 아는 정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미주는 전에
정란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들이 가진 것은 목숨이고
아기들이 가진 것은 생명이라고. 시간과 욕망의 때가 묻어 낡고
비루해진 냄새가 나는 헌 목숨과 연듯빛 잎사귀와 이슬과 대기를
자유롭게 날아 다니는 햇살이 녹아 있는 것 같은 생명. 그 생명을
미주는 자신의 뱃속에 가지고 있다는.
정란은 미주를 설득하기 위해 갈급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었다. 미주는 수화기를 탁자 한쪽에 내려놓은 채 자신의 아랫배를
만졌다. 며칠 전부터 아이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자그마한 물고기의 움직임. 그 경이로운 움직임. 그 느낌은 인생이
여자에게 주는 최대의 희열이었다. 10대와 20대에는 목욕탕에서 배가
불룩한 임산부의 벗은 몸을 보고 이마를 찌푸린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얼마나 동물적으로 보였는지.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한 여자의 어눌한
움직임과 보기 흉한 체형을.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를 자신
속에서 꽃피워 내고 깨워서 키워 가고 있는 기쁨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행복감을 주었다. 마치 아주 작아진 승우를 뱃속에서 조금씩
키우는 기분. 내가 걸으면 아기도 걷고 내가 자면 아기도 자고 내가
먹으면 아기도 함께 먹는다는 동일감은. 남자들은 도저히 느낄수
없는 충만감이었다.
작은 천사를, 작은 천국을 뱃속에 담고 있다는 느낌. 하지만……..
뭐라고 말하기 힘든 칼날의 느낌이 문득문득 들지 않는가. 태아의
바로 위에서 암세포들은 확장하고 있었다.
아기의 생명 위에서 미주 자신의 죽음이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기는 조금씩 싹을 키우듯 몸을 키워 미세한 움직임을
엄마에게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여기 있어………..엄마………..나야. 안녕! 엄마……..하는
타전 말이다. 놀라워라. 삶과 죽음이라는 극과극의 형태가 한 몸
속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니…….. 그 사실이 미주의 경악과
찬탄을 자아냈다.
아기는 희고 선한 천사. 암세포는 검은 악의 그림자. 그렇다면………..
찬찬히 생각을 해보자. 악을 제거하기 위해……..그래. 그 놈들
때문에 아기를 먼저 죽인다는 건 너무나 어이없고 잔인한 짓이
아닌가. 암을 완전히 죽인다는 보장도 전혀 없는데. 멀쩡하게
자라나는 아기를 없애 버리다니. 그럴 수는 없어. 절대로! 말도 안 돼.
자기가 살겠다고 아기를 죽이는 건 정말 내키지 않는 것이야. 어떻게
가진 아기인데. 내가 투병을 해서 살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산다 해도
위를 들어낸 몸이 온전하지도 않고 재발이라는 공포에 내내 시달려야
하지 않는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아기를 다시 갖는다는 건 거짓된
희망에 불과해. 유혹이고 자신을 속이는 비겁한 타협이지.
미주는 한 손을 아랫배에 다른 한 손을 가슴에 갖다 대었다. 아기
속에는 승우 씨도 나도 들었어. 그와 나의 사랑으로 빚어낸 분신이지.
내가 여자로서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아기고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아기야. 그래. 기껏이 내 목숨을 바칠 수 있어. 어떻게
해도 불확실한 게 내 목숨이고 죽는 목숨인데 아기만 태어나게 할 수
있다면. 아기만 무사히 승우 씨 손에 안겨 줄 수 있다면!
미주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 동안
불안과 공포 두려움이 시시각각 미주의 목을 조여 왔다. 하지만 아기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자 갑자기 용기가 생기고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실 수도 있었다. 아기를 보호해야 돼. 아기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이제는 그것만 생각하고 그쪽만 보고 가는 거야.
아기만 생각하고 아기를 위한 일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야. 난
상관없어. 아무래도 좋아. 그래, 그러자! 더 이상 흔들림 없이 절대로
흔들림 없이.
미주는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대 보았다. 전화가 끊겨 있었다. 미주가
오랫동안 아무 말이 없자 정란이 끊은 것이다.
미주는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정란이니? 아……그, 그래.
미주야. 이젠 내 말대로 하는 거지? 나랑 같이 오늘 가는 거야. 그럼
중간 지점에서 만나자. 정란아! 응. 네가 좀 도와 줘. 물론이야. 잘
생각했어. 최선을 다 할게. 승우 씨도 널 살려 낼거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난 결정을 내렸거든. 내 뜻디로 할 수 있도록 네가 옆에서
좀 도와 줘. 부탁이야. 정란아! 미…….주야? 서………..설마
너………? 그래 아기를 낳을 거야.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아기만
생각하기로 결정했어. 내 결정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니까 너도
그런 쪽에 서서 나를 도와 주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의료적인 도움도
필요하게 될 테니까 네가 도와 줘야 돼.
말…..말도 안 돼. 미주야. 그건 너무나 어리석어……..정말 너
바보처럼 굴 거니? 독종처럼 굴 거니? 정란아. 너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누구보다도 충분히 이해할 거야. 생각해 보렴. 내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건 암 퇴치 같은 게 아니고 내가 가진 아기를 무사히 낳는 거야.
나와 승우 씨 사이에 낳을 수 있는 유일한 아기잖아. 너무나 소중해.
이해하지?
잠시 뒤 정란의 흐느낌 소리가 가늘게 흘러 나왔다. 정란아 미안해.
어째 내가 널 매번 힘들게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 아직
통증은 오지 않았니? 아니 전혀 말짱해. 사실 난 지금도 내가 위암 3
기라는 게 믿기지 않아. 평소와 똑같거든. 오진이라고 생각하려는 게
아냐. 단지 잊고 살다 보면 사람이 벼락을 맞듯이 하늘에서 내리는
기적이라는 것도 있지 않겠니? 승우 씨에게 말할 거야. 아기를
가졌다고. 그 사실도 얘기해. 아니 그건 좀 뒤에 해도 늦지 않아.
어차피 나에 대해선 더 이상 늦을 것도 없는걸. 아마………난 승우
씨한테 평생 너 때문에 원망을 듣고 살게 될 거 같다. 도와 줄 거지?
그래 네가 꼭 그래야 한다면 나로선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네가 다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간절해. 하루 빨리 번복하고 날 살려 줘
정란아! 제발! 하고 매달리면 내 마음이 덜 아프고 덜 죄스러울 것
같아. 알아 네 마음. 정말 고맙다! 정란은 애써 감정을 자제하다가
뭔가 복받치는 듯 서둘러 전화를 끊으며 미주에게 말했다.
언제 어떤 상황이든 필요하면 연락 줘 무엇이든 네 뜻대로 즉시 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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